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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경북 경주] 작성자 busan1365  |  작성일 2022-07-22  |  조회수 603
대릉원

주 소 : 경북 경주시 황남동 31-1
전화번호 : 054-750-8650
시 간 : 21:30까지 입장
입 장 료 : 성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경주시민(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 제시). 장애인 복지카드, 국가 유공자증 소지자는 면제(중증장애인 동반 1인 무료)

설 명 :
<대릉원>
경주대릉원은 황남동 일대의 고분들이 한데 모여있는 곳이며, 미추왕릉을 비롯해 황남대총, 천마총 등 22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23기의 신라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고분유적지. 제 13대 미추왕릉과 거대한 표형분(쌍분)의 황남대총, 고분내부 관람이 가능한 천마총의 고분으로 신라 고분유적의 중심!!
대릉원지구로 부른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이다.

<천마총>
1973년 4월 16일 발굴이 시작되어 8월 20일에 발굴되어 발표되기 전까지는 155호 고분으로 불렸다.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국보 제 18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황남대총>
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재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습니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에 속하며, 귀금속 장신구와 희귀한 수입품 그리고 엄청난 양의 철제품과 질그릇이 부장된 점에서 학자들은 이 무덤을 왕릉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왕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1976년에 문화재위원회는 이 무덤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란 뜻으로 ‘황남대총’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을 잇댄 쌍무덤입니다. 먼저 만든 남쪽 무덤[南墳]은 왕의 능이었고, 북쪽 무덤[北墳]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중에 잇댄 왕비의 능이었음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릉, 총, 묘 무덤의 이름과 종류>
릉: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경우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릉 또는 능이라고 불러요.
릉의 종류를 알아보자면 무령왕릉과 미추왕릉, 문무대왕릉, 세종과 소헌왕후인 영릉과 태조의 정비 신덕왕후인 정릉과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등이 있습니다.

총: 무덤의 주인을 모르고 다른 무덤과 구별되는 특별한 유물이 발견되면 그것을 총이라고 이름을 붙히게 됩니다.
왕족의 무덤으로 추측은 되지만 정확한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총이라고 불리는데 무덤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특징을 따서 이름을 짓는다고 합니다.
총의 종류로 예를 들면 무덤에서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고, 고구려의 무용총 같은 경우에는 무용도란 벽화가 있었고,
호우명 그릇이 출토되어 무덤 이름이 호우총이라고 지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묘: 릉과 총과는 다르게 폐위된 왕이나 왕자와 공주 및 옹주 그리고 왕족이 아닌 일반사람들의 무덤을 묘라고 부릅니다.
묘의 종류로 예를 들자면 연산군묘, 광해군묘, 김유신묘, 윤장관군묘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중 김유신묘에서 김유신은 신라에서 왕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왕이 아니다 보니 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고 합니다.
김유신 장군묘에 가면 비석이 두개가 있습니다.
예전부터 전해져 오는 비석에는 묘로 되어 있지만 김해 김씨 후손들이 이후에 세운 비석에는 릉으로 표시되어 김유신 무덤 양쪽에 있다고 합니다.